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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경제 카리칼럼 2014. 11 
혁신기업의 조건 
성균관대학교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교수 김장현 
글로벌 차원의 경쟁은 절대적인 기술력의 우위뿐만 아니라 타깃 시장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이해를 요구하는 
지극히 고달픈 과정이다. 예전에 국경의 틀이 견고하고 무역장벽이 높았던 시절만 해도 특정한 국가나 지역에서의 
우위만 확보하면 일정 기간 안심하고 조직을 추스릴 수 있는 시간이 있었건만, 이제는 덩치가 큰 기업일수록 24시간 
눈을 번쩍 뜨고 상시적으로 혁신하지 않으면, 언제 어떤 형태로 고통을 겪을지 예단하기 힘들다. 
지난 9월, 대구에서 열린 ASIALICS라는 국제학회에서는 혁신학(innovation studies)을 이끄는 대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어떻게 해야 혁신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까 다양한 의견을 교환했다. 그 자리를 통해 필자가 깨달을 수 있었 
던 것은 이제 한국을 혁신의 전범으로 삼아 열의를 갖고 배우려는 나라들이 아시아 전역과 유럽에 두루 존재하며, 그 
들은 두 눈에 불을 켜고 한국의 혁신사례를 경청하면서 어떻게 하면 한국의 압축성장 기법을 따라할 수 있을지 집중 
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지아의 학자들은 이미 한국의 경제 및 사회발전사에 관해 꿰뚫고 있 
었으며,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세계화의 고비마다 한국이 어떻게 고비를 넘겼는지 상세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했 
다. 노키아의 쇠락을 지켜본 유럽의 학자들은 한국의 전자산업이 어떻게 계열화, 다각화와 글로벌화라는 과업을 동 
시에 성공적으로 이뤄냈으며, 아주 오랜 기간 경쟁우위를 지켜내는 원동력은 무엇인지 알고 싶어했다. 나는 그들의 
눈망울에서 간절함을 읽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국내외로 겪고 있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열쇠 역시, 한 때 우리가 가 
졌던 간절한 눈망울의 복원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혁신기업의 아이콘처럼 인식되고 있는 3M은 전체 매출의 30% 이상을 예전에 없었던 신기술을 이용한 상품으로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회사에는 기존의 틀을 벗어난 아이디어일수록 칭찬해 주는 조직문화가 발달해 있 
다. 누구나 혁신의 아이디어를 상품화까지 끌어갈 수 있도록 궁리하도록 하며, 혹시라도 타 부서나 상급자의 간섭으 
로 혁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팀단위 조직마다 중역급 이상이 스폰서로 활동하면서 외풍을 막고 갖가지 지원을 제공 
하도록 하고 있다. ‘포스트 잇’과 같은 저원가 고수익 상품이 하나만 대박을 쳐도 수많은 실패들을 만회할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가 팽배해 있기에 누구든 좋은 아이디어만 떠오르면 수시로 부서원들을 모아 그 아이디어를 발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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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용할 방안을 찾기 위해 골몰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업무시간의 15%는 개인이 새로운 공부를 하거나 자유롭게 자신이 
정한 프로젝트를 위해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흔히 혁신은 업무를 잠시 미뤄 두고 들른 목욕탕이나 잠시 차 한 잔 하 
면서 끄적거린 메모 한 장에서 나온다는 걸 그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집중’과 ‘곁눈질’의 적 
절한 조화는 매우 창의적인 기업문화로 이어졌다. 
필자는 2012년까지 10년 가까이 미국에 살면서, 현대·기아차의 놀라운 성장을 목격한 바 있었다. 2000년 대 초반만 
해도 주류 미국인들은 현대·기아차를 가격에 비해 쓸만한 차 정도로 낮게 평가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서는 도요타 
나 혼다 못지않은 주요한 선택지 중 하나로서 현대·기아차를 평가하고 있다. 이제 현대·기아차 역시 세계적인 혁신기 
업의 반열에 올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빌 게이츠가 지적했듯이 글로벌 경제의 속도는 이미 인간의 생각의 속도와 같아졌다. 소유가 공유로 전환되고, 실 
물소비가 이미지 소비로 바뀌며, 사람 대신 게임 캐릭터나 로봇에게 위안받으며 사는 삶이 이미 현실로 다가왔다. 얼마 전 
만 해도 부자들이 자신의 반려동물에게 유산을 상속했다는 소식이 뉴스매체를 통해 회자되었다면, 앞으로는 그들이 자신 
에게 평생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아픈 육신을 돌보아 준 로봇에게 재산을 상속할 날이 머지 않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는 자동차가 ‘타는 물건’이었다면 앞으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될런 지도 모른다. 자동차가 갖고 있는 첨 
단 기술 덕분에 차를 탄 사람들은 점점 더 게을러지게 될 것이며, 오락과 안식의 공간으로 자동차를 인식하게 될지도 모른 
다. 그러면 차 안에서 사람들은 무얼 하면서 놀고 싶어할까? 자동차가 하나의 미디어가 되는건 아닐까? 마셜 맥루한이 얘기 
한 것처럼 인체의 확장으로서의 하나의 미디어로 자동차가 기능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동차와 대화하게 될까? 이런 도전적 질문들이야 말로 자동차산업의 근본적인 혁신을 부르는 울림이 될 것이다. 
미국 하와이대의 세계적인 미래학자인 짐 데이토(James Dator)는 미래를 막연하게 이해해서는 아무 것도 준비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장밋빛 미래부터 반대편 극단의 암울한 미래까지 네 가지 정도의 다양한 시나리오를 수립하고 거기 
에 걸맞는 혁신을 준비하라고 충고한다. 이 준비과정에는 자동차산업과 같은 특정 분야에 관한 심도있는 정보 수집 뿐만 
아니라 인류사적 관점에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흐름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에 관한 폭넓은 이해가 필수 
다. 모든 행위자가 서로 얽히고 설켜서 북경 나비의 날갯짓이 남극의 빙산을 녹게할 지도 모르는 초연결(hyperconnec-tivity) 
과 불확실성(uncertainty)의 시대에서 현대·기아차 역시 상시적 혁신, 그리고 열린 혁신(open innovation)을 선도 
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는 자동차산업에 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기에 구체적인 충고를 드릴 수 없어 안타깝다. 하 
지만, 어느 산업에든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룰은 있는 것 같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부력의 원리를 깨닫고 ‘아하!’ 
를 외치며 달려나왔듯이 현대·기아차의 누군가가 회사 전체를 먹여살릴 혁신적이지만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아이디어 
를 들고 벌거벗은 몸으로 달려나올 때 얼른 마른 수건을 던져주며 그가 내뱉는 아이디어를 상품화시킬 궁리를 함께하는 
문화. 그런 문화에 혁신의 열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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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기업의> 김장현 성균관대

  • 1. 자동차경제 카리칼럼 2014. 11 혁신기업의 조건 성균관대학교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교수 김장현 글로벌 차원의 경쟁은 절대적인 기술력의 우위뿐만 아니라 타깃 시장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이해를 요구하는 지극히 고달픈 과정이다. 예전에 국경의 틀이 견고하고 무역장벽이 높았던 시절만 해도 특정한 국가나 지역에서의 우위만 확보하면 일정 기간 안심하고 조직을 추스릴 수 있는 시간이 있었건만, 이제는 덩치가 큰 기업일수록 24시간 눈을 번쩍 뜨고 상시적으로 혁신하지 않으면, 언제 어떤 형태로 고통을 겪을지 예단하기 힘들다. 지난 9월, 대구에서 열린 ASIALICS라는 국제학회에서는 혁신학(innovation studies)을 이끄는 대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어떻게 해야 혁신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까 다양한 의견을 교환했다. 그 자리를 통해 필자가 깨달을 수 있었 던 것은 이제 한국을 혁신의 전범으로 삼아 열의를 갖고 배우려는 나라들이 아시아 전역과 유럽에 두루 존재하며, 그 들은 두 눈에 불을 켜고 한국의 혁신사례를 경청하면서 어떻게 하면 한국의 압축성장 기법을 따라할 수 있을지 집중 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지아의 학자들은 이미 한국의 경제 및 사회발전사에 관해 꿰뚫고 있 었으며,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세계화의 고비마다 한국이 어떻게 고비를 넘겼는지 상세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했 다. 노키아의 쇠락을 지켜본 유럽의 학자들은 한국의 전자산업이 어떻게 계열화, 다각화와 글로벌화라는 과업을 동 시에 성공적으로 이뤄냈으며, 아주 오랜 기간 경쟁우위를 지켜내는 원동력은 무엇인지 알고 싶어했다. 나는 그들의 눈망울에서 간절함을 읽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국내외로 겪고 있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열쇠 역시, 한 때 우리가 가 졌던 간절한 눈망울의 복원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혁신기업의 아이콘처럼 인식되고 있는 3M은 전체 매출의 30% 이상을 예전에 없었던 신기술을 이용한 상품으로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회사에는 기존의 틀을 벗어난 아이디어일수록 칭찬해 주는 조직문화가 발달해 있 다. 누구나 혁신의 아이디어를 상품화까지 끌어갈 수 있도록 궁리하도록 하며, 혹시라도 타 부서나 상급자의 간섭으 로 혁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팀단위 조직마다 중역급 이상이 스폰서로 활동하면서 외풍을 막고 갖가지 지원을 제공 하도록 하고 있다. ‘포스트 잇’과 같은 저원가 고수익 상품이 하나만 대박을 쳐도 수많은 실패들을 만회할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가 팽배해 있기에 누구든 좋은 아이디어만 떠오르면 수시로 부서원들을 모아 그 아이디어를 발전적으로 2
  • 2. 활용할 방안을 찾기 위해 골몰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업무시간의 15%는 개인이 새로운 공부를 하거나 자유롭게 자신이 정한 프로젝트를 위해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흔히 혁신은 업무를 잠시 미뤄 두고 들른 목욕탕이나 잠시 차 한 잔 하 면서 끄적거린 메모 한 장에서 나온다는 걸 그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집중’과 ‘곁눈질’의 적 절한 조화는 매우 창의적인 기업문화로 이어졌다. 필자는 2012년까지 10년 가까이 미국에 살면서, 현대·기아차의 놀라운 성장을 목격한 바 있었다. 2000년 대 초반만 해도 주류 미국인들은 현대·기아차를 가격에 비해 쓸만한 차 정도로 낮게 평가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서는 도요타 나 혼다 못지않은 주요한 선택지 중 하나로서 현대·기아차를 평가하고 있다. 이제 현대·기아차 역시 세계적인 혁신기 업의 반열에 올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빌 게이츠가 지적했듯이 글로벌 경제의 속도는 이미 인간의 생각의 속도와 같아졌다. 소유가 공유로 전환되고, 실 물소비가 이미지 소비로 바뀌며, 사람 대신 게임 캐릭터나 로봇에게 위안받으며 사는 삶이 이미 현실로 다가왔다. 얼마 전 만 해도 부자들이 자신의 반려동물에게 유산을 상속했다는 소식이 뉴스매체를 통해 회자되었다면, 앞으로는 그들이 자신 에게 평생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아픈 육신을 돌보아 준 로봇에게 재산을 상속할 날이 머지 않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는 자동차가 ‘타는 물건’이었다면 앞으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될런 지도 모른다. 자동차가 갖고 있는 첨 단 기술 덕분에 차를 탄 사람들은 점점 더 게을러지게 될 것이며, 오락과 안식의 공간으로 자동차를 인식하게 될지도 모른 다. 그러면 차 안에서 사람들은 무얼 하면서 놀고 싶어할까? 자동차가 하나의 미디어가 되는건 아닐까? 마셜 맥루한이 얘기 한 것처럼 인체의 확장으로서의 하나의 미디어로 자동차가 기능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동차와 대화하게 될까? 이런 도전적 질문들이야 말로 자동차산업의 근본적인 혁신을 부르는 울림이 될 것이다. 미국 하와이대의 세계적인 미래학자인 짐 데이토(James Dator)는 미래를 막연하게 이해해서는 아무 것도 준비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장밋빛 미래부터 반대편 극단의 암울한 미래까지 네 가지 정도의 다양한 시나리오를 수립하고 거기 에 걸맞는 혁신을 준비하라고 충고한다. 이 준비과정에는 자동차산업과 같은 특정 분야에 관한 심도있는 정보 수집 뿐만 아니라 인류사적 관점에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흐름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에 관한 폭넓은 이해가 필수 다. 모든 행위자가 서로 얽히고 설켜서 북경 나비의 날갯짓이 남극의 빙산을 녹게할 지도 모르는 초연결(hyperconnec-tivity) 과 불확실성(uncertainty)의 시대에서 현대·기아차 역시 상시적 혁신, 그리고 열린 혁신(open innovation)을 선도 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는 자동차산업에 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기에 구체적인 충고를 드릴 수 없어 안타깝다. 하 지만, 어느 산업에든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룰은 있는 것 같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부력의 원리를 깨닫고 ‘아하!’ 를 외치며 달려나왔듯이 현대·기아차의 누군가가 회사 전체를 먹여살릴 혁신적이지만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아이디어 를 들고 벌거벗은 몸으로 달려나올 때 얼른 마른 수건을 던져주며 그가 내뱉는 아이디어를 상품화시킬 궁리를 함께하는 문화. 그런 문화에 혁신의 열쇠가 있다. 3